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하 전투 (문단 편집) == 항우는 왜 패배하였는가? == [[파일:hr4dcrU.jpg]] 개전 상황을 살펴보면 '''[[답이 없다|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승부가 나 있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항우]]는 자신의 실책도 포함해서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노인 책사 범증을 잃었고 용장 영포는 항우의 처사에 반발해 배신했고 맹장 용저는 한신에게 죽는 등 유능한 야전 장군과 지능을 담당하는 참모를 잃어버렸고, 평화조약을 맺고 군대를 해체했다가 다시 부랴부랴 끌어모았기 때문에 한군보다 병력 면에서 열세였다. 한군의 병력은 초군의 무려 3배였는데, 항우가 [[팽성대전]] 당시 20배에 가까운 병력 차를 뒤집은 적이 있긴 하나, 해하 전투와는 상황이 달랐다. [[팽성]]에서의 연합군이 통제가 안되는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면 해하에 모인 한군 연합은 대원수이자 명장인 한신이 지휘 및 통제하는데다가 착실한 훈련을 받아 모두가 정예병이었으며, 현장서 뛰는 지휘관들은 영포와 팽월등 실전경험이 풍부한 대제후와 한나라 개국공신들 등 하나같이 실전도 쌓이고 뛰어난 통솔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천하무쌍의 항우라고 해도 이 전황을 뒤집기는 힘들었다. 전투가 벌어진 상황을 보면, 항우는 한신의 병력과 맞붙었을 때 한 차례의 우세를 점하기는 했으나 한신의 병력을 격파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만약 항우가 한군의 좌우 공세를 차단하고 한신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해도 후방에는 유방의 중군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선봉대가 위기에 몰리면 얼마든지 지원군을 보낼 수가 있었다. 한 발 더 나아가 항우가 일선 병력을 격파하고 유방이 지휘하는 중군까지 돌파한다고 해도, 배후를 지키는 주발과 시무의 군대 역시 항우와 충분히 일전을 치를 수 있는 병력이었고, 따라서 항우는 적을 완전히 이기기 위해서 세 번 이상의 회전을 연달아 치르고 모두 이겨야만 했다. 항우가 병력상으로 유방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실제로도 [[항우]]는 일선 병력을 돌파하지도 못했다. 항우가 이 전투에서 한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머쥔다 한들, 한나라의 총지휘부가 몰살당하거나 하지 않는 한 여전히 국면을 뒤집을 수가 없다. 관중에는 [[소하]]가 한나라의 기반을 만들어 놓았고, 제나라에서 [[조참]](曹參)이 군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제나라 각지에서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진압하고 있었다.] 제후들이 싸움의 결과를 보고 초나라에 가담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으로 세력구도를 뒤집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팽월은 항우의 세력이 절정에 달하던 시점에서도 항우에 적대하고 있었으니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 모든 제후들이 항우의 편에 붙을 것이라고 여기기도 무리다. 그러므로 집중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의 상황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이다. 어쩌다가 이런 싸움을 해야만 했는가, 항우는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나를 알아보는 것이 이 싸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전투 이전의 상황을 보면, 초나라의 국력 소모도 극심했지만 장기간의 전쟁을 치르는 한나라의 국력 역시 빠른 속도로 고갈되는 중이었다. 실제로 한 고조의 재위기간에는 [[초한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도 죽을 때까지 전쟁의 후폭풍으로 빌빌대었고 북방의 [[흉노]]도 건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참패했다. 고조가 죽은 이후에 국가의 통치 방식도 황로사상에 입각하여 따로 백성들을 건드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란에서 회복되도록 놔두는 것이었다. 진나라를 지탱해주는 풍요로운 관중 지역의 생산력은 대기근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울며 겨자먹기로 오창의 곡식과 (땡처리로 받아온) 파촉 땅의 물자, 그리고 여기저기서 약탈한 것들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다. 본래라면 징집 대상이 아닌 노약자와 청소년까지 병사로 소집했을 정도였다.[* 한나라에게는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상대가 [[항우|잠재적인 적을 없애겠다고 노약자건 청소년이건 마구잡이로 학살하기를 밥먹듯이 하는 자였다는 거다.]] 때문에 백성들은 이 같은 조치에 반기를 들거나 하지 않았다. 한나라 아니면 초나라인데 그 초나라의 군주가 학살 만능주의자에 저꼴이니 한나라 병사가 될 지언정 초나라 지배는 안 받겠다는 게 당연한 심리였다.] 한군이 제후 연합군을 구성한 것도 이미 단독으로는 초군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한신]]과 [[팽월]]에게 왕위와 영토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아군으로 끌어들였고, [[장량(전한)|장량]]과 [[진평]]은 초나라에 계략을 걸어 평화협정을 갑자기 파기하고 비겁한 기습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우가 초군을 해체하게 만들어 병력을 약화시켰으며, 그 틈을 타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해하 전투 당시 한나라 역시 아슬아슬하게 국력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한나라의 기반이 된 관중 지역의 생산력과 보급은 분명 우월하지만, 전쟁으로 소모된 국력이란 몇 달, 혹은 몇 년 기다린다고 짠 하고 보충되는 것이 아니다. 한의 생산력을 너무 신화적으로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하지만 초나라의 국력은 한나라보다 더 막장이었는지라 해하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의 상황은 문자 그대로 끝장에 이르러 있었다. 초나라는 4년이나 쉬지 않고 전쟁을 치렀으며, 팽월이 숨쉬듯이 들쑤시며 약탈을 일삼는 초나라 땅에서는 생산력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광무 대치]]에서 말싸움하는 것을 봐도 계속되는 전쟁에 학을 떼고 있는 것은 유방보다 항우 쪽이다. 초나라의 승리 시나리오는 항우가 해하 전투를 이기고(그것도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력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해야만 한다.) 그 여세를 몰아 단기간에 관중 지역까지 박살내야 한다. 거기다가 그렇게 대승을 거둔 후에도 단독으로 한나라를 끝장낼 힘은 없으니[* 단독으로 한나라를 끝장낼 국력이 남아있었다면 그냥 [[고릉 전투]]에서 유방을 격퇴했을 때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러긴커녕 그 와중에 진성에서 관영과 붙은 쪽이 당하는 바람에 애꿎은 장수들만 죽었다. 관영은 이때의 공으로 식읍을 받았다.] 한나라를 따르던 제후들이 모반하여 완전히 초나라 편에 붙어야 한다. 이쯤되면 삼류 대체역사소설 시나리오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한군 세력의 주요 인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들이 초에 가담할 이유는 없다고 봐도 좋다. 면면을 살펴보면 유방에게 충절을 맹세한 사람, 한 번 초를 배반하고 한으로 돌아선 사람, 항우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한 사람, 항우와 초나라에 복수할 이유가 있는 사람, 항우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져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사람 등등이다. 개인의 사정은 둘째 치더라도, 항우의 포악함과 치졸함을 이미 천하만민이 알고 있으니 초나라에 가담할 리가 없다. 오히려 항우가 계속해서 한군을 격파하더라도, 경포 같은 자가 피폐한 초군을 버리고 돌아서는 경우가 더 가능성이 있다. 물론 해하 전투 시점에서 초나라를 빠져나올 사람은 다 빠져나왔고 항우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만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당시 초군에는 계포와 종리말 등의 장수가 남은 것이 고작이었다. 세력 판도를 살피면서 계속 간을 보던 제후가 없던 것은 아니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제후들이 항우를 지지할 가능성도 있었다. 역사의 승자인 한나라 세력이 부각되고 역사에 이름을 많이 남겨서 그렇지, 항우 역시 한때 중국을 지배한 패왕이므로 당시 항우에게 친화적인 세력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심지어 해하 전투에서 초군이 궤멸한 이후에도 초나라의 잔당이 계속해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궁지에 몰린 [[항우]]는 이전과 달리 건방진 태도를 버리고 주변 세력과 화친하려는 제스쳐를 보내기도 했으므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재기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다. 유방이 다른 군웅들을 포섭하기 위해 영토와 지위라는 실리를 보장해준다고 약속했으니, 같은 방식을 쓴다면 항우가 군웅들을 포섭할 가능성 역시 낮지 않다.[* 문제는 이게 어려운 것이 항우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들 다들 넘어갈지가 문제다. 한신이 말했듯 항우는 상 주는데 매우 인색했고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도 알 수 있듯 상주는 재주도 참 가관이었다. 결국 항우 밑에서 싸우고 나서 상을 받을 수 있을 지 말 지도 고민이고 받아도 만족할 만큼 받을 수 있는지가 문제다. 그나마 이 때는 이전의 분봉과는 달리 딱 하나 자기에게 공을 세웠는지 말았는지만 보면 좋다는 심플한 기준만으로 세워도 별 문제는 없겠지만 앞서 말했듯 항우는 '''상 주는데에 너무 인색했다.''' 반대로 유방의 경우 한신이 '''자신을 왕으로 세워달라는''' 건방진 요구에도 군말없이 해주었을 정도로 화끈했다. 다른 거 필요없이 상을 주는 자세만 봐도 누구에게 붙을 것인지는 이미 정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저런 정황을 따져보면 한나라 쪽에서는 '바로 지금'이 [[항우]]와 초나라를 완벽히 끝장낼 타이밍이었다.한나라도 초나라도 피폐한 상황이었고, 해하 전투에서 끝을 보지 못한다면 한나라가 언제 또다시 항우를 격파할 기회를 잡을지 알 수 없었다. 초한 양국이 아무도 승자가 되지 못한다면 제2의 [[전국시대]]가 찾아올 가능성도 충분했다. 비록 군웅들이 항우를 싫어하지만 초한의 대립구도가 계속되면 군웅들이 세력을 키우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한나라는 반드시 그 시점에서 확실하게 승부를 봐야 했다. 여담으로 이때 한신을 비롯한 한군의 움직임을 보면, 마치 [[한니발 바르카]]가 [[칸나이 전투]]에서 양익포위전술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와 거의 유사한 측면이 있다.[[칸나이 전투]]와 다른 부분이라고 하면 [[기병]]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고 이후의 추격전에서나 이름이 보인다는 정도.[* 한군 기병장 관영이 이끄는 기병대로 마지막에 추격 끝에 항우의 목을 거둬간다.] 물론 한군이야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이용해서 예비대와 양익 포위 전술을 활용한거고 한니발은 적의 절반밖에 안 되는 병력을 기병대의 전투력으로 커버해서 양익 포위를 달성했다는 차이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